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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koreanwar

살아있는 슬픔

by 에밀레 2010. 4. 5.

 
2010년은 한국전쟁 60주년이 되는 해이다. 그리고 동시에 한국 방어를 위해 UN 참전용사들이 이 땅에 고귀한 피를 뿌린지 60년이 되는 해이다.

1950년 9월 25일. 터키 중남부 이스켄더른 항구를 떠난 전함은 10월 17일 부산항에 무스타파 두주균 병사를 내려놓았다. 당시 그의 나이는 22세였으며 장렬히 전사한 그는 UN기념공원에 461명의 전우와 함께 안장되었다. 그의 고향인 아나무르. 그곳엔 이스켄더른 항구에서 손수건을 흔들던 새색시 아이센 두주균 미망인이 80세의 나이로 여전히 남편을 추억하고 있다. 그녀에겐 "곤경에 처한 나라를 구하러 가서 전사한 남편이 자랑스러운" 반면 우리는 정작 그 고마움을 잊어가고 있다.

터키의 또 다른 미망인, 베르한 교구체와 그녀의 아들 에르투. 한국전 전사자 나지 교구체 대위의 아내와 아들이다. 그녀 역시 한국전 당시 갓 결혼한 20세의 신혼이었다. 당시 5개월 된 아들은 이제 60세가 되었다. 그녀는 1950년 11월 25일 한국에서 온 남편의 편지를 받았다. 마지막이 된 그 편지는 이제 노랗게 변했지만 부인은 아직도 편지를 베게 밑에 놓아두고 자기 전에 읽고 잔다.

'한국전쟁 60년'. 참전국 미망인들에겐 아직도 살아있는 슬픔이다. 그러나 정작 전쟁 당사국인 우리에겐 잊혀져가는 전쟁이 되어가고 있다. 이 프로그램은 이 땅의 자유와 번영의 씨앗이 된 터키 참전국 용사들의 미망인과 그들의 가족들을 찾아 끝나지 않은 한국전쟁의 현장을 밀착 조명하고 한국전쟁 60주년의 참 의미와 교훈을 새로이 하고자 한다.

□ 제작형식

1. 프로그램명: 살아있는 슬픔, 한국에서 온 마지막 편지
2. 형 식: HD 촬영 / 녹화 / (50분물*1회)

□ 목표 시청대상
국내 시청자 일반

□ 구성 및 소재의 특징

1.발굴 취재를 통한 전쟁 미망인들의 살아있는 슬픔.

1952년, 터키 앙카라 미국대사관에서 전 세계 언론에 보내진 터키의 젊은 미망인과 가슴에 품은 어린 아들의 사진 한 장, 이름모를 이들은 누구였을까? 참전용사 모두는 누구의 아들이며, 남편이며, 형제였다. 전쟁미망인과 유족들에게 한국전쟁은 여전히 그리운 이의 청춘을 그리워하는 회억으로 자리해 있다. 그들에게 한국전쟁에 몸을 던진 참전용사와 그 전쟁은 어떤 의미로 정리될까. 60년 세월이 지난 뒤, 발굴 취재로 찾은 전쟁미망인들의 증언과 삶을 조명한다.

1. 52년 만에 다시 찾은 북한 땅, 군우리의 참혹한 戰史의 증언

전후(戰後) 52년, UN 참전군들 중 북한 땅을 유일하게 밟은 터키 참전군인과 아틀라스지(誌)의 취재기를 소개한다. 터키군 351명이 희생된 군우리 전투는 한국전쟁 전사(戰史)의 가장 참혹한 지점이자 자유와 평화 수호자인 수많은 UN군을 살려낸 고귀한 희생의 전투지다. 그러나 단 한 명의 묘비도 무덤도 없는 곳, 52년 만에 북한 땅을 다시 찾아 참혹했던 전투지를 밟고 돌아온 증언자들이 전하는 한국전쟁의 생생한 현장에 밀착한다.

1. 사진작가 이병용의 5년간의 기록과 그 현장

지난 5년간 터키 참전 용사와 미망인, 그들의 가족을 찾아서 10여장의 사진을 찍어온 사진작가 이병용. 신혼시절 한국전쟁에서 남편을 잃고 60년 동안 토굴 속에서 혼자 살고 있는 전쟁미망인, 아이세 두주균. 단 한 장의 사진도 남지 않아 추억조차 할 수 없는 그녀의 남편은 부산 유엔 공원묘지에 묻혀있다. 그는 왜 한국전쟁 참전용사를 찍어온 것일까. 그가 전쟁미망인과 지키고자 한 약속은 무엇일까. 그녀를 찾아 4번째 터키 방문을 앞두고 있는 이병용, 그가 안내하는 전쟁미망인과 참전용사들을 만나본다.

1. 한국전쟁을 증언하는 개인소장 미발굴 자료의 재구성

터키 참전용사 유가족들이 소장하고 있는 미 발굴 자료는 60년 전 한국전쟁의 현장을 생생히 전하는 또 다른 증언의 기록이다. 터키 첫 출발지인 기차역, 나부끼는 플랭카드의 문구, 발밑을 조심하라는 부산항의 사진 한 장, 마지막 달리기를 하는 젊은 미망인과 아들, 전장에서 찍어 온 참전용사들의 사진, 한국전 당시 서울과 시골의 모습과 풍경들, 전쟁소식을 알리는 소식지, 그리고 주고받은 편지 등을 개관적 역사자료와 개인사 자료로 구분해 미처 보지 못했던 당시의 분위기와 상황을 재배치하고 재구성한다.

1. 현장 오디오의 현실감 중심, 설명적 나레이션 절제

60년 전 고향을 떠나 돌아오지 못한 터키 참전용사를 그리며 한국국민에게 전하는 편지를 쓴 터키 아다나의 여고 4학년생, 파트마 메르잔. 그녀의 현장 나레이션과 미망인과 참전용사의 인터뷰, 일상적 대화의 현장 오디오를 현실감 있게 전달, 설명적 나레이션을 절제한다.

□ 구성안 요약(시놉시스)

제1편 : 살아있는 슬픔, 한국에서 온 마지막 편지

군복을 입은 남자 아이와 가슴에 훈장을 단 젊은 여자

1952년 2월 26일, 터키 앙카라 미국 대사관에서 전 세계 언론에 사진을 보냈다. 한국전에서 남편을 잃고 가슴에 훈장을 단 젊은 여자와 군복을 입은 남자 아이. 그리고 60여 년 세월이 흐르면서 사진 속 인물들은 잊혀졌다. 누구인지 알 수 없는 젊은 미망인과 아들, 그 단 한 장의 사진... 한국 이스탄불 문화원장, 에르한 아타이 씨는 터키 전쟁 자료 속에서 이 사진을 발견했다. 이들이 누구인지 그 생사여부를 찾았다. 지난 2월 15일. 그가 터키에 걸은 전화기 속에서 할머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자신의 이름은 베르한 교구체이며 한국전 전사자 나지 교구체 대위의 아내라고 전하는 할머니는 60여 년 전 그 사진 속의 여인이었다. 터키여인이 미국 훈장을 가슴에 단 이유는 무엇일까? 그녀에게 한국전쟁은 어떤 의미로 정리될까. 베르한 교구체를 찾아간다.

사진 10만장에 담긴 터키 참전 용사 미망인들과 가족

사진작가 이병용. 그는 지난 5년 동안 터키 참전용사와 미망인들을 카메라에 담아왔다. 군복을 입은 젊은 시절의 남편 사진아래서..60년 세월의 잔주름이 깊이 새겨진 미망인들이 그의 카메라 앞에 섰다. 그가 찍은 사진은 10만 여장.

터키 중남부의 아나무르에서 이병용은 아이세 두주균(81세)을 만났다.. 그의 남편 무스타파 두주균은 이스켄더른 항구를 떠나 1950년 9월 25일 부산항에 도착했다. “발밑을 조심하라는 문구”가 붙은 부산항 사진. 그가 보낸 편지 속에 들었던 사진이었다. 아나무르의 무스타파 두주균(NO-103, Mustafa DUZGUN,Anamur,29,01,1951),

이스켄더른의 기념탑 770명의 전사자 명단과 함께 그의 묘비에 씌어진 기록이다. 앙카라의 한국 공원의 기념탑에도, 부산의 유엔 묘지에도, 용산의 전쟁 기념관에도,,, NO-103, 그는 누구였을까?

마지막 달리기, 1950년 이즈미르의 가을

한국전 첫걸음지인 이즈미르 기차역. 터키군인들이 출발 준비를 서두르고 있었다. 떠나는 그들을 마지막 한 번 만이라도 더 보기 위해 젊은 아내는 아이의 손을 잡고남편과 아버지를 찾아 달려갔다. 다른 한 손에 든 손바구니에는 빵과 몇 가지의 들어있었다. 마지막 달리기였다. 그들의 어깨 너머에는 시민들이 든 플랭카드가 보였다. “한국의 사자들이여 행운이 깃들기를.. 용감하게 싸우길..” 이즈미르, 1950년 가을 기차역의 풍경이었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터키군은 여단병력 5,080명이 1진과 2진으로 나뉘어 1950년9월25과 27일 배를 타고 이스켄더른 항구를 출발해서 20여일만인 10월17일과 19일 각각 부산항에 도착했다.

52년 만에 다시 찾은 참혹한 격전지 북한 땅 군우리 전투 지역

지난 2002년, 터키 참전용사들이 북한(평북) 군우리 땅을 밟았다. 전후 52년 만에 북한 땅을 밟은 유일한 유엔 참전 군인들이었다. 이제는 노인이 된 북한군이 그들을 안내했다. “당신들은 적군도 아니었는데 왜 그 먼데서 와서 싸웠느냐? ” 묻는 그들.

당시 동행 취재한 터키 아틀라스 잡지 취재 기자인, 코로쿠 케츠메즈를 만나 아물지 않은 상흔으로 남은 북한 취재기를 듣는다.

“6년 동안 북한을 끈질기게 설득한 끝에 이뤄진 방문이었죠. 고향에서 무려 9천킬로미터나 떨어진 먼 이국 북한 땅, 군우리에서 전사한 군인들의 묘와 비석은 단 명도 없습니다. ”

군우리 전투는 중공군 2개 사단을 맞아 터키 여단 5천명이 1950년 11월 27~30일까지 3일간 치러낸 전투였다. 이 전투에서 터키군 352명이 전사했다. 3년 한국전쟁 중 터키군 총 사망자는 721명. 실종자는 1005명이다. 터키군 전사자 절반이 한꺼번에 희생된 가장 참혹했던 전투였다.

군우리 전투의 증언자들과 사라지는 증언자들.

제 1터키 부대로 파병됐던 하산씨, 그는 군우리 전투에서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았다. 7년 동안 밤잠을 이루지 못했다. 부산항에서 바로 군우리에 도착했을 때 중공군은 여기저기서 총을 쏘아대기 시작했다. 함께 싸웠던 동료들은 거의 희생되었다. 땅을 파서 묻어 줄 상황이 되지 않아 나뭇잎으로 덮어주고 왔다. 군우리 지역을 방문했던 그의 심정과 증언을 듣는다.

라마단 체넬리씨, 그는 제 2부대에 소속되어 파병되었다. 군우리 전투에서 폭탄이 터져 시력을 잃었다. “나는 50년을 넘게 깜깜한 세상에 살고 있다. 내가 마지막으로 본 것은 오른편에 있었던 강과 왼편에 있었던 계곡이다.”

터키 동부 말라타야, “지금도 동양인을 보면 중공군이 쳐들어오는 것 같아” 전쟁 휴우증으로 평생을 고생해온 바하 티야르 중위. 취재 요청을 두려워했던 그는 지난 10월 사망했다. 터키 메르신 지역의 하키 이세오굴씨. 91세. 09년 8월 23일 딸 하나를 두고 사망했다. 당시 사용했던 부대 깃발, 태극기, 담배갑, 통신문. 그리고 “신이 보내준 내 인생의 마지막 친구는 한국인이다” 라는 유언과 함께 손수 그리고 기록한 한국전쟁 자료를 남겼다.

60년 만의 상봉, 두주균 부부

아이세 두주균은 아나무르의 클루치 마을, 토굴 집에서 혼자 생활하고 있다. 남편의 전사 소식은 1년 후에 그녀에게 전해졌다. 무스타파 두주균, 그는 22세에 전사했다. 터키 전사자 명부에도 그의 사진은 없었다. 그러나 60년 전 결혼증명서를 발급받기 위한 건강진단서 속에서 22세의 무스타 두주균을 찾아냈다. 이병용은 왕복 32시간을 달려가서 젊은 시절 두 사람의 사진을 나란히 액자에 넣어 드렸다. 그렇게 두 사람이 만나는데 59년의 세월이 흘렀다.

“남편이 돌아가신 한국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계시느냐고? 물었을 때 한 치의 주저 없이 "자랑스럽다, 곤경에 처한 나라를 도우러가서 전사한 남편이 자랑스럽다" 라며 당당하게 말한 아이세 두주균 미망인. 그녀의 남편 무스타파 두주균이 묻혀 있는 유엔 공원묘지를 촬영하고 다시 4번째의 방문을 앞두고 있는 이병용. 그와 함께 아이세 두주균 미망인을 만나본다.

1. 터키 아다나의 여고생, 파트마 메르잔의 편지

사진작가 이병용이 만난 터키 아다나의 여고 4학년생, 파트마 메르잔. 60년 전 고향을 떠나 돌아오지 못한 터키 참전용사를 그리며 한국국민에게 전하는 편지를 썼다.

“아! 우리의 영웅! 터키 병사들이여!~중략

“‘기다림은 슬픔의 바다로 변하고 그 바다는 다시는 채워지지 않을 원망과 연민과 긴긴 고통의 늪으로 변해 버렸지요. 당신들 영웅들이여! 그대들이 따뜻한 형제의 땅에서 구름과 춤추고 누워있을 때, 우리는 잠 못 이루는 그 긴긴밤을 오늘도 운명처럼 지새우고 있습니다.“ -파트마 메르잔의 편지 중 일부

한국전쟁은 지난 세월 동안 잊혀져가거나, 자라나는 세대에게는 아예 인식되지 않는 역사가 되고 있다. 그러나 60년 전 참전과 희생의 ‘한국전쟁’에서 참전국 손녀의 ‘한국’으로 이어진 역사는 여전히 우리가 애써 여며할 교훈이며 진행형의 현실이다. 파트마 메르잔이 한국국민에게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무엇일까. 그녀가 편지를 쓴 사연은 무엇일까,
참전국 터키의 손녀, 파트마 메르잔을 만나본다.

1.전쟁 미망인 베르한 교구체, 살아있는 슬픔

이스탄불 문화원에서 찾아낸 베르한 교구체를 만나기 위해 이스탄불의 그녀의 집을 방문한다. 그녀는 1950년 11월 25일 한국에서 온 남편의 편지를 받았다. 그 마지막 편지는 이제 노랗게 변해있었다. 부인은 아직도 이 편지를 베게 밑에 놓아두고 자기 전에 읽고 잔다. 베르한 교구체. 그녀의 남편인 나지 교구체는 군우리 전투지역인 신림리에서 11월 29일 전사했다. 아내에게 편지를 쓴 사흘 뒤였다. 남편의 죽음을 곁에서 본 그의 부하가 3년 뒤 전쟁포로에서 풀려나 그녀를 찾아왔다. 그는 남편의 시계와 지갑을 목숨처럼 간직하고 돌아와 나지 교구체 대위의 유언을 전했다. 자신의 아들을 터키의 민족에게 맡긴다는 유언이었다. 그의 아들 에르투, 그는 60세의 노인이 되었다. 그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장교가 되었다. 미국대사관으로부터 미국 훈장을 받은 사진의 사연을 들려주고 다른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받친 남편을 평생 기다려 온 어머니의 살아있는 슬픈 이야기를 전한다. 한국전쟁 60주년. 우리는 60년 세월의 창을 통해 무엇을 볼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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