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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로부두르 -석가탄신일 기사

by 에밀레 2014. 5. 5.

 

 

의정스님 등 신라 구법승 7C말~8C 중엽 순례지로 다녀간 흔적 남아

미스터리에 쌓인 거대한 부처님 나라-인도네시아 보로부두르 사원을 가다
2014년 05월 01일 (목) 11:24:00 이지범 .

   
▲ 보로부두르 사원 전체 광경.

보로부두르 사원은 캄보디아의 앙코르와트(Angkor Wat) 사원, 미얀마(버마)의 바간(Bagan) 사원과 더불어 동남아시아 지역의 최고 불교유적지다. 이 사원은 인도네시아 자바(Jawa) 섬 중부지역에서 8세기 후반부터 약 100년간 세력을 크게 떨친 샤일렌드라(Śailendra) 왕조에 의해 780~830년간에 건설되었다고 전한다.

그 후, 힌두교 왕국에 의해 샤일랜드라 왕조가 멸망하고 보로부두르 사원까지 역사 속에서 사라진 채 오랜 세월동안 그 존재가 베일에 싸여 전설로만 전해져 오다가 약 1000년이 흐른 뒤인 1814년 이후 다시 세상의 빛을 보게 되었다.

한국에서는 1990년대부터 간혹 소개되었다가 2000년에 들어와서 스님들과 재가불자들이 종종 순례한 곳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로부두르 사원에 대한 방문기나 불교계의 소개는 거의 없었다. 순례자는 늘고 있음에도 관심과 주목을 받지 못하는 미스터리의 부처님나라 인도 보로부두르 사원. <불교저널>은 올해 부처님오신날 봉축특집으로 보로부두르 사원을 소개한다. 이글은 고려대장경연구소 이지범 사무처장이 직접 현장을 탐방하고 돌아와 쓴 것이다.<편집자 주>

   
▲ 감실부처님과 함께한 아침.
▪ 1300년 전, 신라 고승이 순례한 성지

13세기까지 인도 문명권의 영향을 받았던 동남아시아 불교가 7세기경에는 해양왕국이 탄생하면서 더욱 발전하였다. 특히 말라카 해협을 통치하는 여러 항국(港國)도시가 크메르인들의 주도로 왕국으로 출발하여 발전하고, 수마트라(Sumatra) 섬의 팔렘방(舊港; Palembnag)을 거점으로 한 스리비자야 왕국(Srivijaya Kingdom)이 세워져 13세기까지 번영을 누렸다. 이 왕국의 수도였던 팔렘방은 당시 1천명이 넘는 불교 승려를 양성하는 항국도시로써 7세기 후반에 바닷길로 불법을 구하러 서역(인도)에 간 당나라 의정(義淨, 635∼713년) 스님이 이곳을 방문하고 쓴《남해기귀내법전(南海寄歸內法傳)》에 잘 나타나 있다.

또한 의정스님이 지은《대당서역구법고승전(大唐西域求法高僧傳)》에 의하면, “나란타(那蘭陀寺)에 머물며 율과 론을 많이 익힌 아리야발마’(阿離耶跋摩) 스님도 돌아올 마음은 있었으나 끝내 이루지 못했다. 동쪽 경계인 계귀(鷄貴. 계림=신라인)에서 나와 서쪽 끝인 용천(龍泉. 나란타)에서 세상을 마감하니, 그의 나이가 70세였다.”고 《광함구법고승전(光函求法高僧傳)》,《해동고승전》에 전하고, “내가(의정스님) 나란타 사원의 불서를 조사하다 우연히 '불치목(佛齒木) 밑에서 신라승 혜업(慧業)이 베껴 적었다'는 《양론(梁論)》후기(下記)를 보고, 다른 스님에게 물으니 그는 이곳에서 죽었으며 나이는 60살에 가까웠다고 한다.”는 내용이《대당서역구법고승전》에 기록되어 있는 점으로 보아 아마도 이 당시 의정스님과 같이 신라 후기의 승려 아리야발마, 혜업스님들이 이곳 동남아시아 말라카 해협의 팔렘방까지 방문한 것으로도 추측이 된다.

더욱이 팔렘방에서 자바 지역으로 연결된 말라카 해협은 8세기경부터 이슬람 상인이, 9세기경에는 샤일랜드라 왕조가 통치하고, 10세기경부터 중국(唐) 상인이 동남아시아 지역을 찾게 됨으로서 점차 세계 교역의 중심으로 떠올랐다. 그 중심에 당나라 의정스님을 비롯한 신라 등 한반도의 구법승들이 7세기말 8세기 중엽까지 이곳과 교류하면서 샤일랜드라 왕조가 세운 거대한 석조건축물인 브로부두르 사원에 대한 소문과 그로부터 구법순례로까지 이어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 천년동안 은둔했던 세계 최대의 불교사원

   
▲ 회랑벽면에 있는 부처님 탄생 부조.

석유와 나무, 커피 등으로 유명한 국가 인도네시아의 자와(Jawa, 영어명 자바)섬의 한 가운데에 위치한 족자카르타(Jogjakarta)에 있는 최대의 불교유적지 보로부두르(Borobudur) 사원은 세계 7대 불가사의 중에 하나일 만큼 아직도 밝혀지지 못한 신비스러움을 간직하고 있는 곳이다.

이 불교사원이 위치하는 족자카르타는 인도네시아의 수도 자카르타와 이름만 비슷할 뿐 전혀 다른 곳이다. 영문표기는 Jogjakarta(족자카트라)라고도 쓰고, 1972년 공식명칭이 욕야카르타(Yogyakarta)로 바뀌었으나, 현지에서는 아직까지 족자카르타라는 지명을 더 많이 쓰고 있다. 줄여서 족자(Jogja)로 부른다.

보로부두르 사원은 8세기 초반부터 9세기 중엽까지 인도네시아 자바 지역을 지배한 샤일랜드(Śailendra) 왕조의 사마라통가 왕(?)에 의해 824년(비공식) 건설되었다고 전한다. 초기 역사에 대해 알려진 것이 거의 없지만, 이 시기는 캄보디아의 앙코르와트보다 300년이 앞서고, 유럽의 거대한 대성당들이 세워지던 때보다도 400년이나 앞선다.

샤일랜드라 왕조는 이 사원을 완성한 뒤 힌두교 신자야(Sañjaya) 왕국에 의해 붕괴됐다. 이후 보로부두르 사원은 대지진, 화산 분출로 인해 역사 속에서 사라진 채 오랜 세월동안 밀림 속에 있었기에 ‘숲속에 잠자는 유적’이라고 불렀다. 열대 밀림과 두터운 화산재에 덮여 전설로만 전해오던 이 사원은 1814년 네덜란드로부터 한시적으로 자바섬 식민통치권을 인계받은 영국의 토머스 스탠포드 라플즈경(卿)이 탐사를 통해 처음 발견하였고 T. 라플즈가 자신이 직접 유적조사하기 힘들어 현지 사정에 밝은 코르넬리우스라는 네덜란드인에게 조사를 의뢰해 유적을 뒤덮고 있던 숲부터 제거토록 하면서 신비에 싸여 있던 보로부두르 유적이 새 빛을 보게 되었다. 그후 1907년 네덜란드 정부(감독; 테오도어 반 에르프 Theodor van Erp)가 대대적으로 유적 발굴조사를 시작한 지 4년 후인 1911년에 유적의 구조가 명확하게 밝혀짐으로써 그 실체가 드러났다. 그 과정에서 많은 부문이 훼손되기도 했다. 1973년 아시아의 문화유적으로는 최초로 유네스코 주도하에 풍화 등으로 파괴된 부분에 대한 체계적이고 과학적인 복구, 보존작업이 시작돼 1982년까지 추진되었고, 현재와 같은 보로부두르 사원의 모습은 1984년부터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1991년에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으며 아직까지 복원작업이 진행되고 있다.

1300년 전, 열대 밀림 속에 세워진 보로부두르 사원 인근에는 10세기경에 지어진 힌두교 사원 프람비난(Prambanan Temple)도 같이 자리하고 있어 한 지역에 다른 종교가 대규모로 공존하고 있는 셈이다.

오늘날, 현지인과 가이드들이 불가사의하다고 말하는 이 거대한 석조 건축물은 왜 만들었을까? 6세기 중엽 대륙에서 남하한 진랍(CHENLA)이 푸난(FUNAN)부족을 흡수하여 크메르인 최초의 단일국가로 성장한 자이야와르만 1세가 죽은 후 왕위 계승권을 둘러싸고 수(水)진랍(Water CHENLA)과 육(陸)진랍(Land CHENLA)으로 분리되었을 때, 샤일렌드라 왕조가 수진랍의 왕을 축출하고 종주권을 행사하면서 8세기 초에 왕국을 건설했다. 이후 이 왕조는 왕권을 강화하고 권위를 세우기 위한 것과 왕실의 번영과 무사안녕을 제불보살님께 기원하기 위해 보로부두르라는 석조건축 사원을 건립했다고 전한다.

   
▲ 왼쪽에 위치한 회랑.

또, 이 석조건축물을 어떻게 조성되었을까? 현대 건축기술로도 이 사원을 새로 짖기 힘들다. 그것은 원형대로 복구하는데 무려 2500백만 달러가 들었고, 현재 유네스코의 지원으로부터 지금까지 복구하고 있는 것만 보더라도 20년이 더 걸리고 있다. 보로부두르 사원은 수많은 탑이 집합체를 이루고 전체의 모양 또한 탑의 형상을 하고 있다. 화산에 의해 자연적으로 생겨난 구릉 위에다 용암이 응고되어 생성된 흑갈색(黑褐色)의 화산암(火山岩, volcanic rock; 현무암, 安山岩=분황사 모전탑과 감은사지, 기림사탑 등)을 석재로 하여 차곡차곡 쌓아올려 구축했다. 면적은 약 12000㎡, 높이는 약 31.5m이고 2중의 기단(基壇) 위에 방형(方形)으로 5층, 원형으로 3층을 건조하여 8층으로 하였고, 그 정상에 커다란 종(鐘) 모양의 탑을 덮어씌운 구조로 되어 있다. 그 유형은 세계의 불교유적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복잡하고 거대한 건축물이다. 불상, 부조(浮彫)와 석장식의 조각은 아주 세밀하고 그 기법도 매우 정교하며 밀교(密敎)의 만다라(曼茶羅)와 동일하게 디자인(design)하였다. 거대한 화산으로 생겨 둘러싸인 쿠두평원의 중앙에 위치하며 아침과 저녁 풍경이 더욱 더 아름답다.

그러면, 이 사원은 어떤 이유로 천년동안 모습을 드러내지 못했을까? 첫째 원인으로는 대지진과 잇따른 화산폭발로 인해 화산재에 묻힌 것이다. 2006년 5월 므라삐 화산의 대폭발이 일어난 것을 보면 짐작이 된다. 둘째로는 1814년 다시 발견될 당시의 상황으로 보면, 이 사원은 수세기에 걸쳐 밑의 언덕이 침수되어 있었으며, 돌로 지어진 거대한 하중을 이기지 못하고 여러 각도에서 석조건출물 전체가 가라앉아 있었다는 점을 꼽을 수 있다. 셋째로는 이 사원을 건설한 샤일랜드라 왕조가 쇠퇴하면서 함께 역사 속에서 완전히 사라졌던 것이다. 그것은 불교 종주국인 인도를 넘어설 정도로 새로운 문화를 꽃 피우고 캄보디아의 앙코르와트와 쌍벽을 이루었던 이 사원을 세운 샤일랜드라 왕조가 대규모의 사원 건설로 인한 재정파탄과 국민들의 생활 피폐 등 내적요소와 힌두교세의 확장 등 외세의 침공에 효과적으로 대응하지 못하고 멸망하면서 다시 황폐화된 고도(古都) 보로부두르는 그 존재 자체가 멈추면서 역사의 뒤안길로 물러서고 말았다. 아이러니하게도 오늘날 우리가 보고 느끼는 것과 달리 보로부두르는 그 당시의 민중의 피와 땀으로 점철된 고역의 시공간이었다. 수만 명의 노동자가 강제로 동원되어 40〬도가 넘다드는 열대 무더위 속에서 60,000㎦의 돌을 나르고 조각했다는 것만으로 짐작할 수 있다.

▪ 부처님의 나라, 보로부두르 사원

인도네시아의 살아있는 박물관으로 불리는 자바 섬의 거점도시로 ‘행복의 도시’란 의미를 가진 족자카르타에서 북서쪽으로 42km쯤 떨어진(승용차로 1시간반 소요) 마겔랑(Magelang)의 문틸란(Muntilan)에 위치하는 보로부두르 사원은 산스크리트어의 ‘비하라 부다 우르’(vihara Buddha uhr)에서 나온 말로, “언덕 위의 불교사원”이란 뜻을 갖고 있다. 즉, 부처님과 진정한 보살, 그 발견자의 영광을 칭송하기 위해서 언덕(山) 하나를 통째로 만든 거대한 석조 사원이다. 이곳을 2013년 말에 방문한 종림스님은 부처님의 말씀과 행적을 돌에 새긴 대장경(그릇)이라 불렀다.

   
▲ 풍등기원을 봉행하는 인도네시아 스님들.

「내셔널지오그래픽」에서는 명칭유래, 건립연대, 건립자 등에 대한 확증은 없고 대략 7세기말에서 8세기 초 무렵 샤일랜드라 왕국의 대승불교를 신봉한 왕들이 건립한 것으로 추정하고 또 2,672개의 조각그림들과 504개 불상이 있다고 소개한 바 있다.

화산에 의해 생겨난 언덕에 여러 개의 단(壇)으로 건설된 보로부두르 사원은 인도의 굽타 왕조와 이후의 건축양식의 영향을 받았다. 얕은 돋을새김으로 조각된 벽 부조는 총 6㎞이상 길게 뻗어 있는데, 세계에서 가장 크고 온전한 부조 유적으로 꼽힌다. 또한 예술적인 면에서도 전례가 찾기 어려울 만큼 모든 장면이 걸작으로 평가받고 있다.

이 사원의 인근에 자리한 힌두교 사원 프람비난(Prambanan)이 각각 독립된 신전들이 모여 있는 곳이라면, 이곳은 12층 빌딩에 해당하는 35m 높이에 밑단 한 변의 길이가 123m에 이르는 정사각형 밑단 위에 피라미드형으로 그 기반은 육각형이다. 수많은 탑과 성전, 의식 절차를 도면과 같이 조화롭게 구성 조각한 보로부두르 사원은 기단 위의 첫 단은 크기별로 층층이 쌓은 동심형 정사각 5층 계단으로 밑 부문이 피라미드식이다. 이 단 위에는 중심 탑을 얹어 놓은 3단의 원형 받침돌을 놓았다. 그 위에 가운데의 대탑(大塔)을 중심으로 종(鐘)모양의 스투파(stūpa), 그리고 이곳으로 올라가면서 점점 좁아지는 3단의 원형 층계로 총 10개의 각 층에 테라스가 있는 건축구조를 형성하고 있다.

이 사원의 중심 벽에 있는 설화(說話) 부조는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읽는 반면, 난간에 있는 부조는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읽는다. 이것은 신도들이 불상을 오른쪽에 두고 시계방향으로 도는 탑돌이 의식인 ‘프라다크시나’(Pradaksina)를 위해 고안한 것이다. 매몰기단(hidden foot)에는 인과응보(Karmawibangga)를 부조했다. 난간의 벽면에는 부처님의 생애를 기록한 《방광대장엄경(方廣大莊嚴經, Lalitavistara)》이 있는데, 부처의 일생을 완전히 전하지 못하고 후시타(Hushita) 하늘에서 바라나시 근교의 녹야원 설법으로 끝난다. 《본생경(本生經, Jataka)》은 부처님이 왕자 싯다르타로 태어나기 전의 전생담을 실은 것이다. 특히, 녹야원에서 사바세계에 오신 부처님의 탄생담 벽화는 더욱 의미가 있다.

그리고, 난간에 새긴 《비유경(Awadana)》은 본생경과 비슷하지만, 주변의 전설적인 인물들의 성스러운 공적을 이야기로 그린 것이다. 그 스토리는〈영광스러운 하늘의법(Dvijavadana)〉,〈100년 아와다나(Awadana Sataka)〉로 엮었다. 첫번째 회랑의 하단 그림의 처음 20개 부조는 불보살에 관한 진언 형태의 하나로 ‘수다나쿠마라바다나’(Sudhanakumaravadana)를 묘사했고, 두번째 회랑 벽에 새긴 부조는 고귀한 깨달음을 찾아 끝없이 수행하는 선재동자(Sudana)의 모습을 그렸다. 이어 세번째 회랑과 네번째 회랑의 벽과 난간에는 460여 개에 이르는 그림판에 선재동자의 구법(求法, Gandavyuha) 과정을 모두 묘사해 새겼다.

크게 세 부문으로 나눠진 이 사원은 불교의 삼계(三界)를 벽면 부조로 표현하고 있는데, 번뇌에 휩싸인 욕망의 세계-욕계(欲界)와 깨달음을 구하는 형태의 세계-색계(色界=物質界), 인간이 속세의 번뇌를 떨쳐 버리는 신성한 영역인 무색계(無色界=정신세계) 즉, 사원이 만다라적 불교 세계관을 담고 있다. 다르게는 1~3층까지는 인과응보(因果應報)의 세계를, 4~7층까지는 속세를, 8층은 극락(樂園) 세계를 뜻한다고 전한다.

이 사원은 하늘에서 보면 마치 거대한 공룡알을 깨뜨려 놓은 것과 같은 형상이다. 그리고 최고의 백미는 회랑격인 난간 벽면에 새겨진 부조(평면상에 형상을 입체적으로 조각하는 조형기법)이다. 1,500여 개나 되는 벽에 새겨진 조각 이미지는 하나하나 부처님의 탄생과 행적, 가르침 그리고 보살의 생애 10단계 등을 자세하게 새겼다. 이는 그 당시 화려하게 꽃피웠던 불교문화와 예술 조형적 역량을 가늠하기에 충분하다.

이곳 전체를 차례로 보려면, 건물 난간을 따라 시계방향으로 10회를 돌면서 6층까지 올라가야 하는데, 그 거리가 약 5km에 이른다. 이 과정에서 방문자는 엄청난 규모에 놀라고 세밀하고 정교한 구조에 다시 감탄하게 된다. 각각의 테라스에는 432개의 불상이 벽면과 감실(龕室)로 새겨져 있고, 꼭대기 층에는 이중투조(透彫) 방식의 스투파(石塔) 72기에 불상이 규칙적으로 모셔져 있다. 7층에 올라가면 전망대에 선 기분처럼 푸른 대지가 시야에 펼쳐지고, 저 멀리 자리한 산 모양은 부처님이 반듯하게 누운 모습처럼 보인다.

보로부두르 사원의 석조건축은 1층~6층까지가 배움의 과정으로 구성된 공간이었다면, 7층~8층까지는 명상을 통해 깨달음을 얻는 공간이다. 그래서인지 이 사원을 본 수행자들은 한결같이 ‘신전이라기보다 깨달음을 얻는 곳’이라 한다. 공원 매표소를 지나 오르막길이 나올 쯤 그 웅장한 모습은 보는 이를 압도하고도 남는다.

▪ 보로부두르, 우리 곁으로 다가오다

지난 2013년 한해동안 3D기법으로 촬영제작된 <천년의 신화 -보로부두르> 다큐멘터리를 통해 신라와 당대의 고승들이 순례했던 ‘미지의 불적’(佛蹟)을 만나볼 수 있다. 이 동영상은 오는 5월 6일 오후 7:50분 EBS교육방송에서, 5월 7일 오전 7시 불교tv에서 두 차례, ‘부처님오신날’ 특집 방송으로 첫 선을 보인다.

세계 최대의 불교사원 보로부두르는 인도네시아 국민들조차 꼭 가고보고 싶어 하는 관광명소이다. 아직도 때 묻지 않고 소박한 보로부두르에서 하루 이상의 여유를 보낸다면 보로부두르 사원이라는 이유 외에도 많은 이야기를 간직할 수 있다. 부처님오신날에 이곳을 방문하면 믄듯 사원에서부터 보로부드르 사원까지 등불을 든 불자들의 행렬이 끊임없이 이어져 있으며, 밤 12시까지 야간 개장을 하기에 전 세계의 불교도가 이곳에서 회랑돌이를 행한다.

   
▲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알리는 표석.
세계 3대 불교유적지와 세계 10대 불가사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으로 불리고 등재된 보로부두르는 종교적인 의미를 부여하지 않고도 방문 그 자체만으로 유적지가 주는 최고의 감동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무슬림을 국교로 2억만 명이 넘는 인구에 600~700만 명의 불자가 신행활동을 하고 있는 인도네시아의 불교계는 석유 등 지하자원 국제화를 필요로 하는 한국의 새로운 인맥지도를 만들 수 있는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는 전략적 문화 창구이기도 하다.

지금까지 이곳을 방문한 한국 스님과 불자들이 보이지 않게 많다. 그럼에도 보로부두르 사원에 대한 소개가 미흡한 현실은 기존에 우리 친견하는 불상 등 유적에 대한 이미지가 아닌 생경한 이미지로 인한 한계일 수 있다.

천 년 전, 적도의 나라 인도네시아를 순례한 신라의 고승들이 목숨을 내걸고 고행한 구법의 길은 그 후 바닷길과 육로를 따라 동녘의 끝 쪽, 신라의 서라벌과 계림, 금성(지금의 경주)의 불국사와 석굴암, 경주 남산의 마애불로 이어졌다. 그것은 “사라졌다가 다시 우리 곁으로 다가온 슬픈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보로부두르 사원은 이제 한국불교의 오래된 미래이기 때문이다.”

-이지범/고려대장경연구소 사무처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