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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큐/docu story

대장경로드 제작기

by 에밀레 2012. 3. 27.

 

해인사 장경각의 고려대장경은 언제 보아도 위엄이 넘친다. 그런데 이 방대하고도 위엄 넘치는 대장경을 그릇이라 말한다. 대장경의 藏이란 그릇을 의미한다. 藏은 창고, 그릇, 말의 무더기, 기억의 뭉치다. 그런 經을 담은 그릇, 이런 의미를 누가 언제부터 썼던 것일까? 대장경을 만들기 위해 발원했던 이규보의 대장각판군신기고문에 그릇이라는 말이 나온다. 그것도 초조대장경의 그릇이 깨졌기 때문에 다시 만든다는 것이다. 부처의 가르침은 망가뜨려지지 않지만 가르침이 담긴 그릇은 원래 물건이라 망가지는 것은 자연의 운수라고까지 말한다. 그릇을 새로 만드는 일은 자연스러운 일이라는 이규보, 고려인들이 대장경을 새로 만드는 까닭과 의도가 이 간결한 문장에 모두 담겨있다. 대장각판군신기고문은 후일 고려대장경이 진미(眞美)를 갖추게 되는 첫 기도문이었다.

그릇이란 말은 이규보가 처음 쓴 것은 아니었다. 불교의 기억이 한역되는 1900년 전, 페르시아 왕자가 썼다는 藏, 그는 누구일까. 해인사 장경각판 첫 들머리에 방대한 분량으로 꼽혀있는 대금강바라밀다경, 그 안에 그의 이름이 나온다. 안세고다. 그가 살았던 지역에서는 대장경을 산스크리트어나 팔리어로 피타카로 읽는다. 광주리나 바구니라는 의미다. 그것도 다른 형태의 그릇이다. 유네스코 기록 문화유산에 오른 대장경도 트리피타카코리아나란 이름이다. 經은 수트라를 번역한 말이다. 실이나 끈이다. 엮거나 짜는 부처의 말씀이라는 뜻이다. 실에 꽃을 꿰어 꽃다발을 만들듯 말다발을 만드는 것도 또 다른 형태의 그릇이다. 고려인들에게 대장경은 그릇을 만드는 일이었다. 기존의 그릇을 만드는 일이 아니라 보다 크고 오랜 시간을 관통하는 아시아의 문화와 종교 ‘소프트파워’의 그릇을 만드는 일이었다.

세계의 기록문화유산에 등재된 고려대장경은 아시아인의 공동 창작물이다. 총 8만 1천 258매로 구성된 고려대장경은 경.율.논 삼장을 아우른 세계 유일의 목판 대장경이다. 인류문화사 천 년을 담고 있는 最古의 문화 그릇 대장경. 세계기록문화유산으로써의 진정한 가치는 무엇일까. 또 그 그릇에는 어떤 아시아의 최고 문화가치가 잠재 되어있을까. 그리고 풀리지 않은 수수께끼 같은 비밀들은 무엇일까.

인도에서 시작해 서역의 여러 나라, 여러 민족들이 번역하고 유통시킨 문헌들의 집대성이자 아시아인, 세계인의 공동 창작물이 대장경이며 고려대장경은 그런 아시아인, 세계인이 우리에게 준 선물이다. 기존 대장경의 문화다큐 틀을 벗어나 세계기록유산으로써 고려대장경의 아시아 최고의 문화가치를 심층 탐구하는 프로그램을 제작해 보자는 생각으로 촬영의 첫 걸음을 해인사로 놓았다.

깨달은 자, 붓다. 참 스승의 가르침은 무엇일까? 무엇을 주제로 삼을 것인가. 해인사 장경각 안에 들어서자 8만 여장의 빼곡한 경판은 미로가 되었다. 흔히 팔만사천법문이라 말하는 그 방대한 가르침을 어떻게 집약해 말할 수 있을까. 장경각 안에 발을 들여 놓은 것이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다. 고려대장경 2부작 다큐멘터리를 제작했던 경험이 있어 족히 십 수 차례는 되었다. 허지만 언제나 길을 잃기는 매번 같았다. 그 때 마음의 문을 열고 들어 온 경판이 대반열경이었다. 붓다의 마지막 가르침이 담긴 경전. 법보전 판가의 꼭대기에 놓여 진 대반열반경을 햇볕 든 자리에 내려놓고 카메라가 돌기 시작했다. 장경각 안에서 촬영은 어둡더라도 자연광 그대로 촬영하는 것을 기본으로 삼았다. 인위적 조명이 필요하더라도 최소화했다. 6월의 늦봄이었지만 판가 안에는 서늘한 기운이 내려앉았다.

5,200만자를 藏이라는 한 그릇에 담은 의미는 무엇일까? 고려인들뿐 아니라 광대한 지역의 아시아인들이 오랫동안 함께 꿈꾸어 왔던 藏의 세계는 무엇이었을까.

“아난은 내 법을 담는 그릇이다.” 대반열반경권40

부처의 가르침을 담은 그릇, 사람을 그릇으로 삼은 붓다. 아난을 그릇으로 삼는 장면이 대반열반경에 나온다. 붓다의 55세 때의 일이다. 35세에 깨달은 이후 20년간 쏟아낸 말을 부처의 그릇에 담는 일은 문자가 없었던 시절 기억뿐이었다.

붓다가 죽음의 문전에서 제자들에게 남긴 말은 자신의 초라한 육신의 죽음을 슬퍼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허나 제자들은 의지처를 잃는 큰 슬픔이었다. 붓다는 “내가 말한 것이 그대들의 스승이다. 그 가르침을 귀하게 여기라”는 마지막 가르침을 전한다. 죽음은 인간이 겪어야 하는 근원적 고통이다. 유한한 생을 사는 인간의 근원적 고통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깨달았던 붓다. 그도 한 줌의 재로, 별의 먼지로 사라졌다. 그의 팔십 육신은 사라졌지만 그의 가르침은 남았다. 2500년 전의 그의 가르침은 이 세상 다양한 언어와 인종을 넘어 전해진다. 아직도 우리가 현재 진행형으로 그의 가르침을 따르는 이유는 무엇일까? 붓다의 말은 그 당시까지만 해도 기록되지 않았다. 가르침을 스승으로 삼으라고 했던 그의 말은 어떻게 기록되어 전해진 것일까?

개인 기억의 전승을 대중들이 고스란히 꺼내어 문자로 쓰고자 했던 사건이 결집이다. 아난의 그릇을 깨라, 아난의 그릇이 깨어진 후 기억은 야자수 나뭇잎에, 목판에, 종이에 문자로 기록되기 시작한다. 대장경 결집은 전승의 길을 연다. 현재도 제작되고 있는 스리랑카 알루위하라의 팔리어 패엽경, 티벳어로 제작되고 있는 더꺼인경원, 해인사 고려 한역 대장경. 각 민족의 언어와 문화로 개인의 기억을 집단의 기억으로 옮겨 담는 일. 그것이 삼장 결집이었고 삼장의 전승은 오랜 기간 광범위한 지역에서 이뤄져 왔다.

대장경은 그릇이고 길이다. 그 그릇에는 고려인과 아시아인들이 꿈꾸었던 세상의 기억과 말이 문자로 담겼으며 그 길에는 기억을 찾아가는 모험의 역사와 천축을 오간 사람들의 길고도 험난한 여정의 시간이 놓여 있다. 인도, 스리랑카, 티벳, 중국을 오가야 하는 여정이 제작팀 앞에 놓였다. 먼저 총괄 1팀이 인도, 스리랑카를 촬영하고 2팀이 티벳, 중국을 촬영하는 제작진을 꾸렸다. 사전답사를 겸한 인도, 스리랑카 촬영 팀이 폭염의 남방으로 떠났다. 사전에 촬영장비 반입에 어려움이 있다는 코디의 조언이 있어 네팔로 들어가 인도국경을 넘는 루트를 잡았다. 자연히 붓다가 태어난 룸비니가 첫 촬영지가 되었다. 인도는 한 낮 평균 기온이 무려 45도. 아침 6시에 촬영하고 오전 10시 이전에는 촬영을 마쳐야 했다. 오후 5시 무렵부터 7시까지 오후 촬영이 이뤄졌다. 박물관 내부에서도 사전 촬영허가를 내기가 무척 까다로웠다. 기간도 무려 6개월 정도, 준비할 서류도, 거쳐야할 부서도 만만치 않았다. 정식 허가를 내기가 어렵다는 판단이 들었다. 일단 코디에게 준비할 서류를 파악케 하고 박물관장을 섭외 인터뷰를 하면서 현장에서 자연스럽게 촬영하는 방향으로 정했다. 유적지 상황도 촬영하기가 쉬운 상황은 아니었다. 카메라를 들고 들어갈 수는 있지만 삼각대를 놓아서는 안 되었다. 본 촬영 시 고려해야 할 점이 한 두 가지가 아니었다.

대장경의 역사를 이끈 주체는 바로 그 길 위의 사람들이다. 고려대장경은 그들이 오고간 천축의 모험담이며 슈퍼히어로들의 꿈이었다. 사람이 살수 없는 야만의 공간을 문화 문명의 중원으로 만든 대표적 인물은 구마라집과 당 현장 삼장법사다. 두 사람은 한역 대장경, 고려대장경의 주체다. 서천축 인도에서 동쪽으로 온 구마라집은 반야심경의 핵심인 공즉시색을 낳았다. 고려대장경의 반야심경판. 무수한 인경 작업으로 마모되어 단 한글자도 알아볼 수 없다. 이 경판은 서쪽으로 갔던 당 현장의 역경판이다. 금강바라밀다경100권은 구마라집이 역주다. 대방광불화엄경 60권은 당 현장이 역주다. 이 두 사람은 서로 판이하게 다른 생을 살았다. 중원의 문명에 패해 왕자에서 포로가 된 구마라집, 문명의 중원으로 금의환향한 당 현장, 그는 죽음의 사막 지역의 언어와 문물을 익혔다. 구마라집은 중원의 문명 장안에 대소승의 문헌을 전하는 번역주였다. 여러 언어와 문물을 익힌 이들은 지식인이었고 세계인이었으며 한역불문의 양대문파를 개척한 원조들이다. 고려대장경판에는 이들의 숨결과 생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있다.

대장경 목록, 개원석교록에는 목숨을 건 모험의 길이 실려 있다. 그 길은 실크로드로 알려진 길이다. 열다섯 도반이 떠나 아홉은 되돌아가고 하나는 죽고 넷만이 목적지에 도착했다. 촬영 2팀이 타클라마칸 사막을 넘어가는 길은 시간의 길이었다. 기차 안에서 또는 길에서 만난 위그루인들은 불교의 문명과 붓다의 가르침이 전해진 진리의 길임을 짐작조차 못한다. 혜초, 현장이 길 위에서 기록한 여정기들은 대장경루트의 안내서이다. 제작팀은 그 현장을 한 걸음씩 밟아나갔다. 그러나 융성했던 불교문화와 문명은 흔적조차 없이 사라진 모래사막이 된지 오래였다. 허나 대장경은 만 년의 길과 천 년의 시간, 그 길을 오고간 사람들이 함께 만든 공동의 기억이었다. 고려대장경에는 실재했지만 이제는 사라진 낯선 동네, 낯선 사람들의 이름들이 나온다. 구차, 우전, 서천축 마가다국, 나란난타사, 황룡국 등 대장경이 없었다면 알 수도 없었던, 낯설어도 뿌리가 있고 근거가 있는 이름들이다. 그런 것들이 가져다주는 그리움과 간절함은 대장경 루트 속에서 여전히 생생했다.

별을 보고 눈을 밟으며.. 대각국사 의천은 기록한다, “세자를 대신하여 교장의 결집을 발원하는 상소”에는 별을 보고 눈을 밟으며 기억을 챙겨들고 동쪽으로 온 사람들, 기억을 찾아 서쪽으로 간 사람들 덕분에 참된 가르침을 번역해 크게 선양했다는 글이 나온다. 19살 대각국사 의천의 글대로 대장경은 그들 발걸음 덕택에 만들어 질 수 있었다. 그 세월은 무려 천 년 동안 길을 이었다.

돈황사본 문서. 왕오천축국전이 발견된다. 그러나 대장경 속에 일체경음의이가 없었다면 우리는 그 주인공을 밝히지 못했다. 신라인 혜초. 그의 이름은 해인사 일체경음의 경판에 뚜렷이 돋을새김 되어있다. 당(唐)대 밀교 금강지의 전법전수자이자 당나라 장안에서 밀교 최고 승통으로 역경과 전교의 50여년 세월을 살고 생을 마친 혜초. 그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것은 고려대장경이다.

대장경에는 고려인의 주체적인 정신이 담겨있다. 교정 편집자가 당당히 고려국을 간기에 넣었으며 의도된 필획에서 그 정신이 번뜩인다. 고려대장경은 교정 대장경이다. ‘고려국신조대장교정별록’ 에는 교정에 관한 기록이 들어있다. 당.송.원 등 어떤 나라의 대장경도 고려대장경의 교정의 정확도와 우수성으로 그 진미진선에 필적 할 수 없다. 고려대장경의 교정 흔적에는 고려인의 생각, 그들의 선택과 결단, 고민과 정성의 흔적을 볼 수 있다. 온전하게 만들기 위한 고려인들의 정신과 꿈이 담겨있다. 이러한 대장경이 언제 어디서 만들어졌으며 해인사로 옮겨졌는가는 여러 의견들이 다양하게 전해진다. 국내 편에서 고민했던 것은 기존의 다큐에서 한 발짝 더 나아가야 한다는 것이었고 그 부담이 작용했다. 그러던 중 한 편의 논문에서 실마리를 찾았다. 기존의 이운 기록은 조선왕조실록 태조 7년에 근거해 태조 원년에 강화 선원사에서 해인사로 옮겨졌다는 것이다. 그러나 신륵사 대장각기비문과 목은 이색의 인출 기록을 보면 고려 때 이미 해인사에 대장경이 존재해 있었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그 당시 목은 이색이 인출한 대장경 인경본은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인경본으로 오타니 대학에 소장되어 있다. 오타니 대학에서 취재는 매우 흥미로웠다. 절첩본으로 되어있는 오타니 본은 고인쇄 상태가 매우 좋았다. 또한 책 묶음에 충분한 여백이 있어 그동안 알지 못했던 3만 여명의 각수들이 자신의 존재를 드러냈다. 이러한 오타니본을 근거로 대장경 삼장 전체가 이미 고려 때부터 해인사에 모셔져 있었다는 새로운 사실이 나오게 되었다.

고려대장경이 세계유산문화에 등재된 가치도 이처럼 온전하게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목판의 하드웨어와 교정별록과 같은 이야기가 담겨 있는 소프트웨어가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세계의 기억, 인류의 유산이다. 교정별록은 고칠 수 없는 것은 기록을 남겨 미래의 현명한 이에게 고(告) 한다고 했다. 대단한 기록이다. 미래의 현명한 사람들에게 남긴 문제를 풀어줄 사람들은 누구인가. 대장경은 우리 민족, 우리나라보다 더 큰 우리가 함께 만들고 가꿔왔던 유산이다. 대장경 루트를 따라 인도에서 한국 해인사까지 1년 반이라는 시간 여정이 걸렸다. 그 여정 속에서 줄곧 놓지 않은 물음은 현재도 2억 명 정도의 사람들이 각기 다른 언어와 문자로 따르는 부처의 가르침은 무엇이었을까 였다. 부처의 말은 어렵지 않다. 일상의 대화와 문답으로 이뤄져 있다. 길 위에서, 비오는 날 동굴에서, 또는 나무아래서, 자신의 깨달음을 전했다. 제자들이거나, 현자이거나, 찾아오는 마을 사람들이거나, 비천한 천민을 가리지 않고 인간의 물음에 즉문즉설, 즉문즉답으로 전했다. 흙발 걸음으로 그가 걸어갔던 2500년 전의 길, 그 길을 따라 갔던 대장경 로드, 붓다가 그 길 위에서 들려주고자 했던 말은 행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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