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ART, 거닐며 논다

인간의 노래-Namba Koji

by 에밀레 2009. 3. 28.

일본인 친구, 남바코지.
그는 사진을 찍는다. 
그가 한국에서 7년 정도 살면서 남긴 기록이다.

"제가 사진찍기 시작한 아주 초기의 사진들입니다 .
시장 다니고 많이 찍었습니다.

오래전 그가 나에게 한 장의 사진과 글을 보여주었다.
사진은 일본군 위안부였던 박두리 할머니의 사진이었다.
그는 나눔의 집에서 한 때 기거하며 자원활동가로 있었다.
나는 잊고 지냈던 박두리 할머니를 그 사진 속에서 보았다.
이제 박두리 할머니는 이 세상에 거처하지 않으신다.
남바코지가 박두리 할머니를
자신의 가슴 속에 남긴 기록이다.

제목은 인간의 노래이다.


-

남바코지가 찍고 만들다.


인간의 노래 -박두리-

 

내가 좋아했던 박두리 할머니가 돌아가셨다.

2006년 2월 19일 18시 20분, 박두리 할머니가 입원했던 병원에서

담낭염 수술 중 암세포가 발견되었고 복부쪽에 퍼졌다고 한다. 대장으로 암이 퍼진 것이었다.

 

내가 박두리 할머니를 마지막으로 본 것은 작년 여름 입원하신 병원에서였다. 머리를 스님처럼 깎은 할머니는 예전보다 더 작게 보였지만 크고 탁한 목소리와 약간 거만스럽고 장난기 많은 표정은 여전했다. 나를 보고 당연한 듯이 안마해달라고 나뭇가지처럼 가는 다리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눈과 표정으로 이야기했다.

 

나는 살이 하나도 없는 그 다리를 주물러드리면서 할머니가 나랑 같이 온 친구들에게 계속 자기를 나눔의 집으로 데리고 가달라고 하는 목소리를 듣고 있었다. 10일만 기다리면 나눔의 집에서 할머니를 데리러 올 거라고 어쩔 수 없이 대답하는 친구 목소리를 들으면서 박두리 할머니는 “역시 그곳에 돌아가고 싶구나”라고 생각했다.

 

나눔의 집은 태평양전쟁 때 일본군인을 위한 위안부로 끌려가셨다가 위안소에서 몇 년 동안 감금되어 성적, 육체적 학대를 당한 피해자들이 공동생활을 하는 시설이다. 박두리 할머니도 그 피해자지만 나는 그 과거에 대한 이야기를 할머니와 직접 한 적이 없다. 단지 자료에 남아있는 기록과 주변 사람들에게 들은 이야기를 생각하면서 눈 앞에 가만히 앉아계시는 할머니 얼굴을 상상 속의 과거와 겹쳐볼 뿐이었다.

 

내가 자주 나눔의 집을 다니던 시절 박두리 할머니는 거기에 살고 계셨다. 나눔의 집에는 처음에 들어왔다가 계속 사시는 분들도 몇 명 계시지만 계셨다가 나가셔서 다른 곳에서 사시는 분과 새로 들어오시는 분이 매년 몇 분씩 계시기에 항상 열 분 정도의 할머니들이 사신다.

위안부 피해 신고자는 현재까지 230명이고 그 중 생존자는 125명이 되는데, 그  일부의 할머니들이 나눔의 집에 거주한다.

 

박두리 할머니는 귀가 거의 안 들리셔서 아주 친한 사람이 아니면 대화하기가 힘들다. 친한 사람이면 주파수가 맞는 것처럼 잘 들리는 모양이다. 나는 목소리를 크게 해보거나 천천히 이야기해서 주파수를 맞추려고 애를 쓰기도 했다. 그러다 나는 말로 하는 대화가 잘 안 되어서 말로 대화하는 것을 포기했다. 대신 나는 카메라를 통해서 이야기하려고 노력하기로 했다.

 

나눔의 집에서 자원봉사자로든 직원으로든 간에 할머니들과 잘 살려면 할머니들에게 자신의 존재를 인정 받아야 한다. 나는 박두리 할머니 방에 처음 놀러 갔을 때 안마를 해드렸다. 나는 그 때까지 어르신에게 안마를 해드린 적이 없었지만 긴장하면서도 할머니가 시키는대로 열심히 해봤다.

 

끝나고 나니까 할머니가 아주 잘한다고 해주셨다. 그리고 담배 피우냐고 물어보시니까 “예”라고 답을 했다. 할머니는 자기 담배에 불을 붙이면서 담뱃갑을 던져주고 “피워”라고 한 마디 하셨다. 나는 할머니가 담배를 피우는 모습을 보면서 “아주 멋진 할머니다”고 생각했다.

 

그 후 할머니는 나를 볼 때마다 안마해달라고 방으로 부르고 안마를 해드리면 담배, 귤, 과자 등을 주셨다. 나중에 알았지만 할머니는 자원봉사나 학생들이 오면 누구에게든지 안마를 해달라고 했었다. 그 모습을 보고 “이것도 박두리 할머니가 대화하려는 방법의 하나구나”라고 생각했다.

할머니가 엄지손가락을 세우고 “너 최고다”고 내가 하는 안마를 칭찬해주신 것이 나의 작은 자랑거리였다.  

 

할머니 방에서 같이 담배를 피우면서 지내는 시간에는 말로 하는 대화가 거의 없었다. 할머니가 가끔 뭔가 물어보시면 내가 몸짓과 표정으로 답을 했다. 그렇게 시간을 지내면서 나는 사진을 찍었다. 내가 카메라를 들고 있는 모습이 그 공간에서 당연해지면서 가끔 할머니가 카메라를 의식해서 담배를 멋있게 피우는 포즈를 취하거나 찍지 말라고 베개를 던지고 장난 질 때 나는 할머니와 대화를 하고 있는 것을 느꼈다.

 

할머니는 머리가 똑똑하시고 눈치가 아주 빠르셨다.

언젠가 거실에 여러 사람이 모여서 나눔의 집에서 후원자들에게 보내는 편지를 정리했는데, 몇 백 통이나 되는 편지를 정리하니까 쓰레기가 점점 쌓여갔다.  다들 자기 일이 바빠서 신경 못쓰고 있었을 때 내가 쓰레기통을 찾으려고 고개를 돌려보니까 방에서 나오신 박두리 할머니가 어디선가에서 쓰레기통을 가져와주셨다. 그렇게 순간적으로 상황을 파악하고 배려하는 것은 그렇게 쉽지 않은 일이다.

 

밤에 잠이 잘 안 오시는 할머니는 항상 밤이 되면 방에 놀러 오라고 하셨다. 나는 따로 할 일도 있어서 조금 시간이 신경 쓰이면서 할머니 방에 있을 때도 있었는데, 그럴 때는 어떻게 아시는지 “가서 일하라”고 하셨다.

 

시대나 환경이 다르면 학교에 가서 공부하고 친구랑 놀았을 어린 시절에 위안부로 끌려가신 할머니는 해방 이후도 계속 고생하셔서 글을 못 배웠다. 나눔의 집에 오시기 전에 시장에서 장사하셨을 때는 복잡한 계산과 많은 숫자정보를 다 머리 속에 기억시키고 일을 하셨다고 한다.

 

2003년 3월 할머니가 자신이 입으신 피해에 대한 공식사죄와 보상을 일본정부에 요구하는 소송에서 기각판결이 나왔을 때 할머니는 계속 기분이 안 좋으셨다. 나를 쳐다보지도 않고 방에서 나오셔도 아무 말을 안 하셨다. 그 때만큼은 일본인인 나를 미워하는 것처럼 느껴져서 이 할머니와 나의 관계가 그렇게 일반적이고 쉬운 것이 아니라는 것을 느꼈다.

 

다른 할머니들도 그렇지만 박두리 할머니는 여자가 일 안 하고 놀고 있는 것을 싫어하셨다. 그런 것을 몰랐을 때는 나는 청소 같은 것도 적극적으로 했던 편이다. 내가 막 해버리니까 다른 자원봉사 여자 분이 할 일 없이 앉아계셨는데, 그런 것을 보면 할머니는 일 안 하는 여자로 생각해서 싫어하셨다. 그렇게 되면 그 여자 분은 할머니에게 욕먹고 무시당하기에 그곳에 있기 불편해진다. 그래서 나는 청소 같은 집안일은 잘 안 하고 밖에서 하는 일만 하게 되었다.

 

나는 할머니와 싸운 적도 있다. 싸웠다기보다 내가 혼자 화냈는데, 한번은 할머니가 담배를 끊겠다고 이야기했을 때였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로는 할머니는 그 전에도 몇 번씩 그런 말씀을 하셨다고 하는데, 나는 그 말을 믿고 할머니와 약속을 했다. 자꾸 기침을 하시는 것을 걱정했던 나는 아주 기뻤다. 할머니는 자기가 갖고 있는 담배를 다 나한테 주셨다.

 

그 후 며칠 동안은 담배를 안 피우시고 나도 할머니 앞에서 안 피웠다. 그런데 어느 날 보니까 내 가방 속에 있던 담배가 없어졌다. 담배를 찾고 있을 때 다른 사람에게 할머니가 방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설마 하면서 방에 들어가니까 아무렇지도 않게 담배를 피우고 계셨다. 그것도 내 가방 속에 있던 담배였다. 내 가방에서 몰래 꺼내서 담배를 피우고 계셨던 것이다.

 

지금 생각하면 그것도 할머니의 장난 같은 것이었다고 생각할 수 있는데, 그 때는 정말 이해할 수 없었다. 나와 굳게 약속한 할머니가 내 가방에서 담배를 훔쳐서 피우시다니.. 나는 정말 화가 나서 그 후 며칠 동안 할머니와 이야기를 안 했다. 처음에는 내가 왜 그렇게 화내는지 이해 못하시는 것처럼 평소와 같이 안마해달라고 말하셨는데, 나는 싫다고 거절했다.

 

이제 정말 내가 화내고 있다는 것을 느끼셨는지, 어느날 안마 해달라는 소리 없이 과자인가 뭔가를 주셨다. 그 독특한 거만스러운 표정도 안 보였다. “미안하다는 표시인가?”하면서 나는 그것을 받았다.

 

그 후 나는 일이 바빠져서 나눔의 집에 자주 안 가게 되었다. 한 때는 1주일의 반 이상을 나눔에 집에서 지냈는데, 시간이 흐를수록 그것이 한 달에 한번이 되고 석 달에 한번이 되고 반년에 한번이 되었다. 그런 가운데 2004년 2월쯤, 할머니가 입원하셨다는 이야기를 듣고 친구들이랑 그 병원을 찾아갔다. 오래간만에 본 할머니는 너무 살이 빠지고 안 좋아보였다. 인사를 드려도 반응에 힘이 없으시고 나를 제대로 알아보고 계시는지도 모르는 정도이었다.

 

그 후 2004년 3월에 할머니는 다른 병원으로 옮기셨다. 그 병원에서 5개월 만에 만난 할머니는 그 전의 병원에서 봤을 때보다 건강해보였다. 다리가 안 좋아져서 휠체어를 사용했지만 찾아간 우리를 보고 너무 반가워 하시고 자꾸 나눔의 집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하셨다.

 

1년 후에 병원으로 할머니를 찾아간 것이 마지막이 되었다. 그 동안 나눔의 집에도 못 갔었지만 나눔의 집의 할머니들보다 혼자 계시는 박두리 할머니가 더 신경 쓰였었다. 오래간만에 할머니 다리를 주물러드리면서 그 동안 이 병실에서 혼자 어떻게 지냈을까 생각했다. 물론 나눔의 집을 포함한 관계자들이 자주 찾아왔겠지만 내가 할머니와 지냈던 곳과 다른 공간에서 너무 많은 시간이 흘렸다는 것을 느꼈다. 자주 찾아오지 않았던 것을 후회했다.

 

할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연락을 내가 받은 것은 돌아가시고 2시간 정도 지난 밤 8시쯤이었다. 그 전에 병원에서 봤을 때는 그렇게 건강하게 보였는데, 갑자기 그런 소식을 들으니까 전혀 실감이 안 왔다. 연락해준 친구와 다음날 같이 가자는 약속을 하고 그 친구가  “아는 사람들한테 알려달라”는 말에 무의식적으로 따라 여러 군데 연락했다. 그런데 기분이 이상해서 일도 못하고 잠자려고 해도 안 되서 10시를 넘어서 집을 나와 할머니가 계시는 병원을 찾아갔다.

 

가는 도중 뭘 생각했는지 잘 모르지만 술 마시면서 할머니를 보내드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서 도중에 소주 한 병을 사갖고 갔다. 장례식장을 찾아가니까 몇 명의 관계자와 가족만 와있었다. 나는 먼저 제단에 있는 할머니 사진에 인사를 드렸는데, 정신이 없어서 한국식 절을 못하고 일본식 절로 인사를 드렸다. 그리고 단 한 명의 자식인 따님과 그 가족을 뵈었는데, 특히 손녀가 할머니를 많이 닮은 것 같았다.

 

나는 그 후 따님의 허락을 받고 제단 앞에서 혼자 술을 마셨다. 그 동안 할머니와 지냈던 일들을 천천히 생각하면서 한 병 다 마신 후 손녀에게 할머니가 마지막에 무슨 말을 하셨는지 물어봤다. 할머니는 끝까지 의식이 안 돌아오셨다고 대답해주었다.

 

다음 날 아침에 할머니들의 활동을 지원하는 정대협에서 오신 분과 가족 네 분이 할머니의 입관을 지켜보았다. 나도 같이 가서 할머니의 마지막 모습을 뵈었다. 시신이 되신 할머니와 대면하신 가족 분들의 가슴 아픈 곡을 들면서 나는 마지막으로 박두리 할머니 얼굴을 봤다. 그 때도 할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사실이 이상하게도 실감이 잘 안 왔다.

 

다음날 노제를 끝내고 화장터에서 할머니의 관이 화장로에 들어갈 때 울면서 보내는 가족 분들 모습을 사진을 찍었다. 그러다 나도 갑자기 크게 슬픔이 복받쳐서 눈물을 멈출 수 없었다. 나는 카메라에서 손을 떼고 할머니를 보내는 그 슬픔을 가슴에 담았다.   

 

나는 할머니와 지내면서 많은 것을 얻었다. 의사소통, 과거역사, 인간성, 아픔과 슬픔. 이런 내가 할머니에게 얻은 덕(德)을 할머니에게 갚아드리지는 못했지만 그것을 필요로 하는 다른 사람들에게 나눠드리고 싶다는 바람으로 이 기록을 남긴다.

 

2006년 2월 25일 남바 코지

'ART, 거닐며 논다' 카테고리의 다른 글

바이칼  (0) 2012.01.18
아티샤-티벳,일상의 기도문  (0) 2010.10.12
룸비니 동산의 명상  (0) 2010.09.09
샹그리라 골목길에서  (0) 2010.09.08
행복한 사람들  (0) 2009.03.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