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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큐/docu story

이제는 그들도 강물처럼

by 에밀레 2009. 12. 18.


이 다큐멘타리는 프로젝트 ‘재인폭포상회’의 영상기록으로 제작되었다.

프로젝트 '재인폭포상회'는 2003년부터 현재까지 삶의 터를 중심으로 생태환경의 의미를 되새기는 현장미술(島展)을 진행해오고 있는 '순수창작집단 그룹 스폰치'가 기획하였으며, 경기북부지역 커뮤니티아트를 실천하고 연구하는 공간 '문화살롱 공'이 주관하고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후원으로 진행된 사업이다.


“강물이 안 들어오면 나한테 이런 일은 안 닥치잖아요”
86세 탁영수 할머니. 할머니에게 “강물이 들어온다”는 일은 얼마 남지 않은 인생을 두고 치러내야 할 큰 사건이다. 막내아들을 뱃속에 넣었던 39세 때, 할머니는 할아버지 손에 이끌려 고문 2리에 들어왔다. 그 세월이 벌써 50여 년을 바라본다. 아들, 딸들은 벌써 시집 장가를 가서 자식들을 낳고 일산, 성남 등 외지에서 산다. 막내아들만이 가까운 연천읍에 살고 할머니는 언제든 옮겨가야 할 낡은 집에서 산다. “곧 옮겨가야 할 텐데” 아들집으로 훌쩍 거처를 옮기지 못하는 할머니의 걱정은 한탄강 댐 공사로 인해 집안 구석구석에 쌓이는 모래바람과 먼지처럼 하루하루씩 켜켜이 덧쌓여 간다.



할머니의 거처를 두고 아들들 입장은 서로 다르다. 그래서 할머니는 가기는 가야하지만 터전을 옮겨가야 하는 사실이 아침자리에서 눈뜨면 제일 먼저 하는 걱정거리가 되었다. 이만큼 살아왔으니 자식이든 며느리든 어느 누구의 눈치를 보지 않고도 자유롭게 홀로 살다 눈감으면 되는 것이 할머니의 바람이다. 아파트도 미로 같고 문 닫아 걸면 감옥이라는 것을 아는 할머니다. 맛난 음식이 아니어도 김칫국에 아침 밥 한 술 뜨고 가을 뒷산 낙엽을 바스락바스락 밟으며 도토리를 주우러 가는 것이 할머니에게는 하루 하루 남은 소중한 자유다.

다큐는 이것이 언젠가 실제로 있었던 이야기라는 사실에서 시작된다. 2012년, 한탄강 댐이 건설된 후 그곳에 마을이 있었고 사람들이 살았던 이야기는 점차 잊혀 갈 것이다. 경기도 연천군 전곡읍 고문 2리. 이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된다. 왜 이 이야기부터 해야 하는 것인가. 할머니의 ‘강물’ 말 한 마디에 ‘일어나지 않아도 될 일’이 일어난 한탄강댐 건설 지역 수몰 주민들의 고통이 담겨있다. “이 꼴 난 집을 사진 찍어 뭐 해?” 라고 하는 할머니 말대로 다 기울어져 가는 집이지만 할머니에게는 ‘얼마 남지 않은 여생의 시간’을 보내야 할 터전이며 굴곡진 50여년을 살아온 개인사가 담겨 있다.



한탄강 댐 조감도에는 사람이 보이지 않는다. 푸른 산과 나무, 드넓은 공원과 맑은 물이 한 순간 정지된 듯 그려져 있다. 한탄강 댐도 그리 큰 위용을 드러내지 않는다. 아주 높은 고공에서 본 이상적인 세상, 그래서 전혀 현실감 없이 허망하게 보이지만 그 허망함이 언제든 현실이 된다. 사람이 보이지 않는 그림이 땅에 그려질 때부터 개인의 고통과 갈등이 뒤따른다. 홍수조절용 댐이라는 국가 정책이 공공의 선으로 옮겨질 때 로또 땅이 된 사람도 있지만 언제나 개인의 고통을 감내해야 하는 사람들은 소수자들이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보상이라는 돈이 아니라 최소한 내가 살 수 있는 아주 작은 배려다.


아직 떠나지 못하고 고문 2리에 남아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았다. 산물도 강물도 많은 지역에서 오히려 그들은 ‘먹을 물“이 없어 ’물 고생‘을 하면서 살았다. 댐이 생기면서 그들은 다시 강물 때문에 터전을 내주어야 하는 ’물 고통‘을 겪었다. 그 사이 사람이 갈라졌고 마을이 분열됐다. 이미 보상을 받고 떠난 사람들은 또 다시 낯선 외지거나 고문리 인근에서 새 삶을 살아야 한다. 아직 남아 있는 30여 호의 자유이주와 집단이주의 사람들은 내년 봄을 기다리고 있다. 그들이 고문리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자리 잡는 것은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다. 그들은 수자원 공사가 물러가면 한바탕 분탕칠 된 마을이 스스로 자정될 것이라고 믿는다. 끝까지 희망을 놓지 않는 그들이 이제는 강물처럼 흘러 새로운 땅에서 그들의 삶을 넉넉히 적셨으면 하는 바람이다. 짧은 시간에 그들과 진정한 이야기를 나누지 못한 것이 죄송스럽다.